‘천상열차분야지도’의 해설문에 새겨져있는 것처럼, 원래 이 천문도는 고구려 때의 것이 있었는데, 전란 속에 대동강에 빠져 버렸다는 것이다.  다행히 이성계가 새로 왕조를 세우자, 어떤 사람이 그 탁본(拓本)을 갖다 바쳤고, 류방택은 바로 그 고구려 때의 천문도를 탁본한 자료를 바탕으로 그 사이 변화된 별들의 위치를 바로잡는 작업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고려 천문학자들은 이미 원(元:중국)에서 천문학 지식을 수입해 오고 있었다.  당시 고려에서는 중국의 당(唐)나라 때 발달된 선명력(宣明曆)을 사용했는데, 물론 그대로 쓸 수 있는 것은 아니어서 고려에 맞도록 수정하며 이를 따랐던 것이 밝혀져 있다.  이 역법 내지 천문계산법은 대단히 훌륭한 것이었지만 822년 시작된 역법을 위도와 경도가 다른 고려에서 몇 세기 동안 사용한다는 것은 물론 모순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고려 천문학자들이 필요한 수정을 해서 독자적 천문 계산을 하고 있었다.  이 시기 고려와 중국의 달력에 날짜가 다른 경우가 가끔 생긴 것은 그 때문이다.

  그 사이 중국을 차지한 몽골족의 원나라는 새 역법 수시력(授時曆)을 개발해 냈고, 그 새 역법은 1281년 사신 왕통(王通)을 고려에 보내 전해주었다.  그는 고려에 와서 낮에는 해시계로 시간을 재고, 고려의 지도를 보았으며, 밤에는 천문관측을 한 것으로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고려 천문학자들은 아직 이를 고려에 맞게 배워 들일만한 준비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 남아 있는 수시력 계산표 ‘수시력첩법입성’은 1346년 서운정(書雲正)을 강보(姜保)가 만든 것인데, 그의 스승 최성지(崔誠之 1265~1330)가 원나라까지 가서 배워 온 것을 바탕으로 완성했을 것이다.  또 같은 시기에 오윤부(伍允孚 ?~1304)는 천문도를 만들었는데, 뒤에 그것이 표준이 될 정도로 훌륭했다는 기록도 ‘고려사’는 전하고 있다.

  류방택이 ‘천상열차분야지도’에 맞는 천문계산을 하면서 이들을 참고했을 것은 분명하다.  그가 직접 중국에 다녀왔다는 기록은 없다.  하지만 류방택이 우리 국보 ‘천상열차분야지도’에 새겨놓은 1,467개의 별들을 다시 계산해 확인하는 작업의 책임자였고, 서운관 관계자 8명 가운데 몇이 그를 도운 것은 확실하다.  이것만으로도 류방택이 당대 최고 천문학자였음을 알 수가 있다.  그렇게 시작된 조선 초의 천문학이 세종 24년(1442)의 위대한 성과 칠정산(七政算)으로 역사에 남게 되었던 셈이다.  칠정(七政)이란 칠요(七曜)와 같은 뜻으로, 해와 달 그리고 다섯행성을 뜻한다.  서울 기준으로 이들 천체 운동을 계산할 수 있게 되면서 세종 때에는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맞는 역법(천문계산법)을 완성했다.  처음으로 일식, 월식 등을 완벽하게 예보할 수 있게 되었음을 EMt한다.  류방택은 고려 말에서 조선 초까지 이뤄진 천문학 발달의 중심에 서 있었던 천문학자였다.  고려 말의 최성지, 오윤부, 강보에서 조선 초 세종대의 이순지(李純之) 김담(金淡)을 이어주는 중간 역할을 담당했다고 판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