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헌 류방택 행적
류방택 선생은 그의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개로 인해 잘 알려지지 않은 고려 말의 선비이다. 그의 절개는그에 대한 기록을 남기지 않게 하였으나 서산지역을 중심으로 곳곳에남겨진 그의 자취들은 오히려 그의 숨은 절개를 더욱 빛나게 하고 있다.
류방택 선생의 자(字)는 태보(兌甫)요, 호(號)는 금헌(琴軒)이다.
본관은 서령(瑞寧):현재의 서산)인으로 서령부원군 유성간(柳成澗)의 7대손이다.
서산지역에 있는 가야산 개심사 아래 양리촌(陽里村)에서 출생한 선생은 어려서부터 성품이 온화하고, 덕이 있으며, 효도와 우애가 모두 지극하였을 분 아니라 학문에 대진(大振)하였으나 벼슬에는 뜻을 두지 않았다.
특히 주역의 이치와 천체의 운행을 발게 통달하여 세상 사람이 큰선비로 칭송하였다.
1361년(공민왕(10) 겨울에 홍건적이 개성에 침입하여 국가가 혼란에 빠지므로 선생이 그동안 연구했던 자료를 토대로 역서(曆書)를 제작하였는데 이것이 티끌만큼도 오차가 없어 선생의 명성이 당세에 높았다.
1362년(공민왕11) 그의 업적이 높이 사 밀직부사(密直副使:정3품) 겸 판서운관사(判書雲觀事):현재 기상청장에 해당)에 등용되었으나 곧 치사(致仕)하고, 집으로 돌아와 향시인 감군은곡(感君恩曲)을 지어 거문고로 연주하면서 천문(天文) 탐구에 몰두하였다.
그 후 역성혁명(易姓革命)으로 고려가 망하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의(節義)를 매세하고 곧 서산땅 도비산(島飛山)에 은둔하였다.
이태조가 등극하자 당시의 역서(易書)는 천체의 운행을 맞추지 못하고, 중성(中星)의 도수에 오차가 있으므로
이를 근심하였다. 또한 고구려 천문도의 인본을 구하였으나 시대가 많이 지났으므로 이를 추산하도록 서운관에 명하였으나 서운관에서는 류방택이 아니면 할 수 없다고 하자 여러번 선생을 불렀으나 도비산에 숨어 나오지 않았다가 부득이 상경하여 역서를 새로 만들고, 별자리 운행을 관측하여 인본에 있는 별들을 모두 추산하였다.
류방택 선생이 추산하고 권근(權近)외 11명과 함께 천문도를 석각하였는데 이것이 현재 국보 제228호로 지정된 천상열차분야지도이다.
그공로로 이태조는 선생께 개국 1등 공신 녹권(錄券)을 내렸으나 굳게 이를 사양하고, 송도 취령산 밑에 김포고을에 자취를 감춘 뒤 산정에 단(壇)을 만들고 날마다 고려의 도읍지 송도를 내려다보며 눈물을 흘리니 그때 나이 75세였다.
그 때 한탄하여 읊은 술회시(述懷時)에 “소나무를 위로하며 심히 사랑함은 서리잎에 나무가 추울까 걱정되기 때문이요. 기죽(淇竹)을 한마음으로 가련타 사모함은 눈 쌓인 가지가 늘어지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으니 선생의 충절을 가치 추정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 후 1399(정조1)에 동학사에 들어가 옛 임금과 정포은(鄭圃隱), 이목은(李牧隱) 두 선생을 초혼(招魂)하여 제사를 지내고, 개성을 바라보며 옛 임금의 한을 달래며 일생을 마치니 그때 나이 83세였다.
죽기 전에 유언하기를 고려인이므로 내 묘에 봉분을 짓지 말고, 일체의 석물을 세우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자식들에게는 새 임금을 섬기라 하였다. 이는 선생의 고려에 대한 불사이군의 충정을 밝히는 대목이다.
태종 4년에 정숙공(靜肅公)이란 시호가 내려지고, 1621년(광해군 13)에 동학사의 삼은(三隱:鄭圃隱, 李牧隱, 吉治隱) 다음에 배향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이태조는 선생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반가워서 예산 EKd 연봉장까지 내려와 선생을 맞이했다고 하며, 이때 이태조는 마땅히 고려조에 신하로서 선생을 주빈지례로 영접하여야 했는데 군신지례로 영접핶기 때문에 태조가 실례를 했다고 해서 예산에 있는 신례원(新禮院)이 본래 잃을실(失)자로 실례원(失禮院))이라 호칭하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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