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09-04-11 16:13
류방택행장2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4,802  
류방택행장2 선생의 휘는 방택이요, 자는 태보요, 본관은 서주인으로 서령부원군 휘 성간의 6세손이다. 증조 휘 공기는 함문지후 증관정대부 첨의찬성사 수문전태학사 감수국사판전리사요, 할아버지 휘 굉은 증문하평리상호군이요, 아버지 휘성거는 전객령을 치사하였다. 백양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3남을 생하니 선생이 그 장남이다. 원조 연우 7년 1320년 경신 4월 15일에 태어났다. 선생은 천성이 어질고 인자하여 용모는 온화하고, 순량하며 행동은 안전하고 무거웠다. 말소리는 크지 않게 하고 과거보는 학문을 섬기지 않고, 어릴 때부터 뜻을 경학에 두어 장성하매 경문에 있는 뜻을 발휘하여 독실하게 아버지를 섬겼다. 우제를 양지하여 그 성함을 더하고 낙구의 이치와 천체의 운행을 또한 꿰뚫어 통하지 않음이 없었다. 이로써 세상에서도 석덕한 선비라고 칭송하였다. 그러나 졸을 구원에 기르고 명자를 감추어 뜰에 송황을 심으니 그 정절을 취함이었다. 별사 한 채를 지어 당호를 금헌이라 하니 금은 그 뜻이 禁 이라. 禁은 ‘그 사심을 금한다’하고, 또한 ‘작이 아니면 군자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니 학자는 먼저 금을 배워 그 사악하고 더러움을 깨끗이 씻고 그 앙금을 다 녹여 더부룩한 심정을 산제한 연후라야 정심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하였으니 묵묵히 거문고의 이치를 강구하여서 그 당호를 걸었음은 이로써 공이 출세의 뜻이 없음을 엿볼 수 있다. 신축년 1361년 겨울에 홍건적이 개성에 침입하자강화가 크게 어지러워지므로국력을 편성할 수 없어 선생이 사조한 역서를 강화병마사가 그 역을 써서 행하니 사후에 국력과 일호의 착오도 없었으므로 공의 명성이 드디어 당세에 현효하였다. 임인년 1362년 가을에 서주땅에 내려가 사는데 선생의 이학을 천거하여 사대감판사에 등용되었으나 잠시 치사하다가 귀가하여 감군곡을 거문고로 장탄하면서 세월을 보냈다. 고려의 운세가 이미 다하고 이태조가 등극하자 24기가 혼효하여 중성의 도수에 착오가 있으므로 태조가 근심하고 운관에게 개기서를 명하였으나 운관은 진청하여 판사 유금헌이 아니면 개기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때에 선생은 도비산에 숨어서 나오지 아니 하니 여러 번 태조의 부름을 받고 부득이 상경하여 양촌 권근과 중직대부 설경수와 함게 추보에 잠신하여 성전을 개기하니 이 글에 구릉을 써서 24기의 혼효를 살펴 중성이 과연 협화하고, 그 도수가 바로 잡혔으니 주무왕 때 구주홍범과 더불어 상부하였다. 그때 사람들은 또한 사람의 기지가 있다고 칭송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이태조는 개국일등공신호를 하사하였으나 굳이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그리고 송도 취영산 밑 김포방에 자취를 감추니 그때 나이 75세였다. 마당에다 축실을 설단하고 날마다 고향을 바라보며 눈물을 뿌리면서 지은 시가 있으니 그 탄음한 술회시에 ‘소나무를 위로 하매 심히 사랑함은 서리 앞에 나무가 추울까 걱정되기 때문이요, 기죽을 한마음으로 가련타 사모함은 눈 쌓인 가지가 늘어지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이 글귀를 보면 충정한 절의가 가히 충만하였음을 추찰할 수가 있다. 공이 임종 시에 두 아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고려인이므로 송도에서 죽으니 죽거들랑 내 무덤에 봉분하지 말고 묘비석을 세우지 말라’고 유명하였다. 이날이 황명건문 임오 1402년 2월 5일이었다. 다음해 1월 12일에 임강현 도원원에 안장하니 이곳이 공이 살던 집이 있는 곳이다. 대제학 정이오는 명예효우로서 탄명하니 ‘그 도가 나라에 있도다. 현상을 규찰하고 이수를 산정하였도다. 그가 몰하니 국인이 슬퍼하고 사람이 애석히 여겼도다’하였다. 선생은 예조 판서 손사의 장녀에게 장가들어 3남 2녀를 두었으니 장자는 백유로서 어릴 때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목은 문하에서 수업하고, 지정경자 1360년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홍무무신 1368년에 도 생원시에 합격하고, 기유과 1369년 전시에 장원급제하고, 곧바로 춘추관에 들어가 이조판서와 집현전 대제학에 이르렀다. 차자 백종은 조봉대부 검교사재 부정에 이르렀고, 계자 백순은 홍무신해과 1371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병진과 1376년에 6위로 급제하고, 벼슬은 대사성 이조병조참의에 이르렀다. 永樂九年卯 前通政大夫 贊成事 大提學 晋城 鄭以吾 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