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09-04-11 16:12
류방택행장1
 글쓴이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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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방택행장1 선친의 성은 류씨이며 이름은 방택(方澤)이니 서주(瑞州)사랍입니다. 증조 할아버지의 이름은 공기(公器)이니 합문지후 증광정대부 첨의찬성사 수문전태학사 감수국사 판전리사사이며, 조부는 이름이 굉(宏)이니 증문하평리 상호군이며 아버지의 이름은 성거(成巨)이니 전객령으로 벼슬에서 물러나셨습니다. 오장 백량(白良)의 따님과 혼인하여 3남 4녀를 낳으니 선친이 그 장남이십니다. 서주 양리마을에서 태어나셨는데 곧 충숙왕 7년 경신(1320) 4월 15일입니다. 공민왕 1년(1352) 선친의 나이 33세로, 그해 4월에 처음으로 섭산원(攝散員)이 되시고, 공민왕 8년(1359) 12월에 풍저창(豊儲倉)의 수직랑(修職郞)을 임명받고, 공민왕 16년(1367) 12월에 서운관주부로 진급하였는데 공민왕 1년(1367) 6월에 서운관을 사천감(司天監)으로 이름을 고치니 모두 선덕랑(宣德郞)의 직품을 받았습니다. 공민왕 20년(1371) 5월에 아버지가 별세하였는데 그해 9월에 목을 벗고 일어나게 하여 추동관정(秋冬官正)으로 임명하여 장복(章服-무늬나 기호따위를 넣은 천으로 만든 벼슬아치의 관복)을 하사하였다. 이듬해 또 서운관(書雲觀)으로 고치니 직품은 모두 조봉랑(朝奉郞)을 받았습니다. 공민왕 23년(1374) 12월에 종부시승(宗簿侍丞)으로 전임하여 서운관을 겸직하고 통직랑(通直郞)을 받았으며 이듬해 4월에 부정(副正)이 되니 직품은 봉선대부(奉善大夫)이며, 우왕 2년(1376) 8월에 중현대부(中顯大夫) 사재령(司宰令)을 더하였습니다. 우왕 5년(1379) 8월에 원윤(元尹)으로서 판서운관사(判書雲觀事)를 겸직하고, 창왕 1년(1389) 검교밀직부사(檢校密直副使)에서 판서운관사를 겸직하니 지굼은 모두 봉익대부(奉翊大夫)입니다. 그 후 조선조에 들어와서 정종 2년(1400)n 12월에 다시 가정대부(嘉靖大夫) 검교한성윤 행 판서운관사에 임명되니 이것이 선친의 관력(官歷)의 순서입니다. 선친은 성품이 침잠9마음이 가락앉혀 생각이 깊음)하고 민첩하여 기해년(1359) 풍저창(豊儲倉)을 임명받고 서울에 사는데, 이웃에 이울(李蔚)이라는 단인(端人, 마음이 바르고 정의감이 두터운사람)이 있었으니 수학에 정통한 서운관의 선비였습니다. 선친은 휴가일을 이용하여 그 기술을 습득하여 꿰뚫어 보았습니다. 신축년(1361) 겨울에 홍건적이 서울을 침범하였는데 선친은 강화도로 피해 들어가니 이때에 나라의 역서(曆書)가 모두 헤어지고 흩어져 있어서 이용할 수 없게 되자 사사로이 역서를 만드니 강화병사(江華兵使)가 그 역서를 사용하여 행사하였습니다. 뒤에 나라에서 감정한 바 역법이 하나도 착오가 없었으므로 이로 말미암아 드디어 명성이 들어나게 되었습니다. 임인년(1362) 가을에 서산(瑞山)으로 내려와 있었는데 서운관이 추천하여 권지주부(權知主簿, 고려나 조선조에서 임시직을 나타내어 직함의 앞에 붙인 것을 권지(權知)라 한다)가 되니 정미년(1367)이었습니다. 그해 겨울 실직의 주부가 되고 여러 번 판사를 겸하였습니다. 조선 태조가 즉위함에 미쳐서 24기가 혼잡하고, 중성(中星)의 도수가 착오가 있으므로 서운관에게 개기(改紀)할 것을 명하였는데 서운관에게 ‘류방택이 아니면 고칠 수 없습니다’고 아뢰었는데 이때에 선친은 벼슬을 그만두고 집에 있었습니다. 태조가 선친에게 서운관의 일을 제조(提調, 관제상의 우두머리가 아닌 사람이 그 관청의 일을 다스리게 한 벼슬로서 종1품 또는 종 2품의 품질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경우를 말함)하여 별자리를 개기하게 하니, 선친은 이에 천체를 관측하는데 잠심(潛心, 마음을 두어 깊이 생각함)하여 개기하고 임금에게 말씀을 아뢰었습니다. 서운관에서 이를 살펴보니 24기의 혼효중성(昏曉中星, 저녁녘과 새벽녘)을 살펴보니 중성이 과연 맞고, 그 도수가 바로 잡혔으니 지금 돌에 새긴 천문도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서운관의 벼슬과 원종공신의 녹권(錄券, 공신의 공훈을 새긴 쇠로 만든 패)을 하사하니 이것이 선친이 행사한 자취였습니다. 선친의 마음씨는 인자하시고 용모가 EK뜻하였으며 행동거지가 정중하여 큰소리를 안 하시고, 이익을 탐하지 않고 산업을 일삼지 않으셨습니다. 병으로 임오년(1402) 2월 5일 송도(松都) 김포집에서 별세하시니 향년(享年)이 83세셨습니다. 이듬해 1월 12일에 임강현(臨江縣) 도원원(桃源原, 도원 벌판)에 장사하였습니다. 선친은 증판도판서 행평택감무 손사(孫俟)의 장녀와 혼인하여 3남 2녀를 낳았는데 장남 백유(伯濡)는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며 공민왕 9년(1360) 8월에 도촌(挑村)문하의 선비로 나아가 고부(古賦, 옛날 지방의 공거(각 지방의 우수한 인재를 선발하여 등용하는 제도)에서 선발된 선비)로 3층을 뽑히고, 무신년(1368) 8월에 다시 생원시 제2인으로 뽑혔으며, 이듬해에 회시(會試, 문무과의 초시에 합격한 자가 서울에 모여 다시보는 복시)와 전시(殿試, 임금이 참석한 가운제 마지막 보는 과거시험)에 각각 제1인으로 급제하여 곧바로 춘추관 수찬(修撰)으로 들어가서 승사랑(承仕郞)이 되었습니다. 그 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겸교한성윤․집현전 제학에 이르렀습니다. 2남인 백종(伯淙)은 학문이 미달하여서 벼슬이 조봉대부(朝奉大夫) 검교사재부정에 이르렀으며, 막내아들 백순(伯淳)은 신해년(1371)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병진년(1376)에 제 6인으로 급제하여 처음에 비서교감․예문관 검열에 임명되고, 대사성․사간원 사간(司諫)․이조 병조참의․가선대부 인녕부윤(仁寧府尹)에 이르렀습니다. 장녀는 낭장(郎將) 안길(安吉)에게 시집을 갔고, 차녀는 장수감무 고습(高隰)에게 시집을 갔는데 선친보다 1년 전에 죽어서 후사가 없었습니다. 첩인 이씨는 1남 1녀를 낳았으니 아들 윤지(允池)는 선친보다 12년전에 죽고, 딸은 임피현령 안덕상(安德祥)에게 시집을 갔습니다. 손자는 약간이 있습니다. 한성윤 백유(伯濡)는 의정부참찬 박수(朴秀)의 막내딸과 혼인하여 2남 1녀를 낳았는데 딸은 첨서령 위윤(魏贇)에게 시집을 갔으나 후사가 없었고, 장남인 미(渼)는 태조 2년(1393) 백자과(百子科) 진자 제1인이 되고, 병자년(1396)의 생원시에 제4인으로 합격하고, 정종 1년 기묘(1933)에 회시(會試) 제2인, 전신(殿試) 동진사(同進士) 제5인으로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가 학유(學諭)가 된 후 사헌부감찰․직강(直講)․헌납(獻納)․이(吏), 병(兵), 예조(禮曹)의 정랑과 좌랑을 역임하고 지금은 중직대부(中直大夫) 지인천군사가 되어 있습니다. 둘째 아들인 회(淮)는 신묘년(1411)에 생원시에 3등으로 합격하고 벼슬이 승의랑(承議郞) 안산유학교도(安山儒學敎道)에 이르렀습니다. 부정(副正) 백종(伯淙)은 판서 김승용(金丞瑢)의 딸과 결혼하여 1남 의(宜)를 낳으니 벼슬은 하지 않았고, 김씨가 먼저 죽자 또 김씨와 재혼하여 2녀 1남을 두었으니 모두 어렸습니다. 부윤 백순(伯淳)은 서운관부정 남익겸(南益謙)의 딸과 혼인하여 3녀를 낳았으니 장녀는 봉례랑사 김계학(金繼學)에게 시집을 갔는데 다시 결혼한 노씨가 2남을 낳았으니 장남 지생(遲生)은 비소로 배움이 나아가고, 둘째 아들은 어려서 이름을 짓지 않았습니다. 외손은 약간이 있습니다. 낭장 안길(安吉)은 1남 1녀를 낳으니 아들은 경생(敬生)이고 딸은 선공감녹사 정안의(鄭安義)에게 시집을 가니 손자가 약간이 있고, 지인천군사 미(渼)는 황주목판사 현맹인(玄孟仁)의 딸과 혼인하여 4남 1녀를 낳으니 장남 익동(益潼)은 과거공부를 하고 있고, 둘째아들 익민(益澠)과 셋째 아들 익강(益江)은 모두 학교에 들어갔고, 막내 아들 익경(益涇은 아직 학교가 가지 못하였습니다. 딸은 아직 어립니다. 교도(敎道) 회(淮)는 겸교한성윤 채윤경(蔡允敬0의 딸과 결혼하여 1남 희윤(希潤)을 낳으니 학교에 들어가고, 사재소감 기진(奇瑨)의 딸과 재혼하여 2남을 낳았으니 장남은 희저(希渚)이며 차남은 금년(1421)에 출생하였습니다. 부정 백종(伯淙)의 아들 의(宜)는 문씨와 결혼하여 4남 5녀를 낳았고, 봉례 송은(宋殷)은 아들딸 몇 명을 낳았고, 현감 구익령(具益岺)은 2남 1녀를 낳았고, 녹사 김계학(金繼學)은 2남 1녀를 낳았고, 외증손이 약산있습니다. 안경생(安敬生)은 임씨와 혼인하여 아들딸 몇 명을 낳았으며, 녹사 정안의(鄭安義)는 딸 하나를 낳았습니다. 세조 3년 신축년(1421) 4월 6일 아들 백유(伯濡)는 삼가 행장을 짓다.